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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 이야기

양녕대군은 태종이 무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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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은 태종이 무섭지 않았다?



 

태종의 첫째 아들이었던 양녕대군.

본인의 처갓집과 세종의 처갓집을 박살 내었던 태종의 말을 엄청나게 듣지 않았던 양녕대군.
도대체 양녕대군은 왜 그랬을까? 태종이 무섭지 않았던 것일까?

무서웠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양녕대군은 태종이 무섭지 않았다.

양녕대군은 장남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방원에게는 위로 자식 셋이 더 있었고 자식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런 이방원에게 양녕대군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었던 셈이다. 양녕이 어릴 때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밀려서 집에만 있는 동안 하루 종일 곁에 붙어 있으며 놀아주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양녕은 아버지가 무섭지 않았던 것이다.

이방원이 양녕을 세자 자리에 올리자 양녕은 기행을 일삼기 시작한다. 양녕은 남의 첩을 빼앗기 시작하는데. 바로 충주 부사의 첩인 어리라는 여인을 빼앗은 사건으로 태종의 분노를 살게 된다. 태종은 어리를 돌려놓으라고 하자 양녕은 본인의 처갓집에 어리를 숨겨놓고 애까지 낳게 되면서 태종에게 밉보이게 된다. 그러는 동안 태종은 계속해서 어르고 달랬다. 

결국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된다. 이 때 이방원은 아끼고 아끼던 아들을 폐세자 시키면서 엄청 울었다고 한다. 

나중에 세종이 집권하게 되면 양녕이 왕권에 위협이 될까 봐 대신들은 양녕을 멀리 보내라고 주청을 올린다. 그리하여 이방원은 경기도 광주로 양녕대군을 보낸다.(경기도 광주는 그리 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원경왕후가 아들 양녕이 보고 싶지 않겠느냐는 핑계를 대며 보낸다. 참으로 아꼈던 것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세종이 즉위해 있는 동안에도 양녕은 계속해서 사고만 치고 다녀 세종에겐 골칫거리였다.

신하들은 매번 세종에게 양녕대군을 멀리 보내라고 청하나 세종은 자신의 형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불쌍해서 그냥 둔다. 세종의 왕권이 강화될수록 양녕대군은 동생의 덕을 보게 된다. 남의 집 첩 뺏기부터 개차반으로 행동하나 워낙에 세종이 왕 노릇을 잘하다 보니 양녕의 비행은 묻히게 되었던 것이다.

양녕대군은 세종의 자식 중에 수양대군과 잘 지냈다고 하는데 (수양대군이 술을 잘 마셔서 마음에 들었나보다.) 훗날 계유정난 때 양녕은 수양대군의 편에 섰다고 한다. 

양녕대군에 대한 또 다른 설
 
이방원이 양녕을 폐세자를 시키면서 제일 걱정했던 것이 있었다. 자신이 왕자의 난으로 왕위에 올라갔는데 또다른 왕자의 난이 벌어질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양녕이 왕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멀리서 스님처럼 지내든지 아님 망나니로 지내던데 해야 했어야 했고 망나니를 선택한 것이다. 지금의 숭례문 현판은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서예를 잘한다는 것은 학문적 지식이 높았다는 것이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일화
 
양녕대군은 효령이 불당을 짓자 놀러를 간다. 사냥 다녀오면서 잡은 새와 짐승을 들고 가서 불당 앞에서 구워먹었다고 한다. 또한 효령이 불경드릴 때 여우, 토끼 등을 들고 가서 불교 마당에 풀어버린다. 효령은 "형님은 지옥이 두렵지 않습 네가?"라고 묻자 양녕은 "내가 뭐가 두렵냐. 난 살아서는 왕의 형이고, 죽어서는 불사를 닦은 너의 형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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