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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 이야기

소헌왕후 심씨(조선 최고의 국모로 추앙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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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왕후 심 씨(조선 최고의 국모로 추앙되다)  


소헌왕후 심씨 

 

1408년 충녕대군과 혼인하였다.  

태종 이방원의 장남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세자빈이 된다. 

1417년 왕비에 오르다.

일찍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방원은 상왕으로써 통치하였고 세종 초기 실질적인 힘은 태종에게 있었다.

 
고려 말 화약을 만든 최무선과 함께 왜구를 소탕하고 조선이 건국되고 궁궐을 짓고 종묘를 만드는데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심온은 소헌왕후의 아버지였다. 이 당시 영의정이란 높은 자리에 있었던 심온. 심온의 집 앞은 사람들로 늘 문전성시였다.

태종은 왕자의 난에서 보았듯이 외척은 왕권 강화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다.

 
이때 강상인이라는 자가 이방원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만 보고하는 일이 발생한다.
태종은 타깃을 심온으로 두고 강상인을 문책하게 되고 의도했던 대로 강상인은 심온의 이름을 실토하게 한다.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자마자 의주에서 심온을 체포하고 바로 국문을 연다.
심온은 태종의 뜻을 알아채고 태종이 원하는 대답을 하게 되며 그다음 날 사형에 처해진다. 태종은 심온의 형제뿐만 아니라 아들들을 유배 보내고 심온의 아내와 딸들은 관노로 삼는다.

 
소헌왕후는 8남 2녀를 낳는다.

 
정소공주-세종대왕이 15살때 낳은 장으로 왕실의 장녀다 보니 이방원이 상당히 아꼈다고 한다. 13세의 이른 나이게 죽게 되고 세종대왕이 시신을 부여잡고 가슴 아프게 울었다고 한다.

문종(장남)-학문에도 능하고 동생도 잘 돌보았고 잘 생겼다고 한다.

 

안동 김씨 집안이었던 휘빈 김 씨와 결혼한다. 그때 문종은 16세, 휘빈 김 씨는 20세. 휘빈 김 씨는 박색이어서 문종은 휘빈 김 씨를 좋아하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더더욱이 학문에 집중을 하게 되고 본인의 스타일이었던 효도와 덕금이라는 궁녀와 가깝게 지내게 된다. 이에 휘빈 김 씨는 문종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방법을 알기 위해 무당에게 간다. 무당이 알려준 대로 궁녀들의 신발을 불태워서 불태운 재를 문종의 술에 넣는 등등... 이러한 일들이 발각되어서 결국은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두 번째 부인인 순빈 봉 씨는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음주가무를 좋아하지 않았던 문종은 점점 순빈 봉 씨를 멀리하고 후궁 세명을 더 맞이하게 된다. 후궁들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자 순빈 봉 씨는 임신했다는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소쌍과 단지라는 궁녀들과 동성애도 즐겼다고 한다.

정의공주-정소공주가 죽고 실질적인 장녀 역할을 한다. 아빠를 닮아 학문에도 능하고 천문 지리에 능했다. 

수양대군-계유정난은 통해 세조가 된다

안평대군- 조선 전기 최고의 명필

소헌왕후는 내명부를 잘 통제해서 왕실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통성 있는 아들들이 많았기에 후궁의 자식들은 왕을 노릴 수 있는 구실 조차 없었다. 그 중 세종대왕이 가장 아꼈던 후궁 신빈 김 씨가 있었는데 후궁 신빈 김 씨는 6남 2녀를 낳는다. 소헌왕후는 질투를 할 법 한데 신빈 김 씨에게 자신의 아이들을 맡길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라가 자신의 형제들은 죽였으나 신빈 김 씨의 자식들과는 사이좋게 지냈다고 한다. 신빈 김 씨는 훗날 세종대왕이 승하한 후에 스스로 절에 들어가서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소헌왕후가 죽고나서 궁궐 안에 내불당이라는 이름의 불당을 짓는다. 집현전 학자들은 그동안 억불정책을 추진해왔는데 왕실에 내불당이 무슨 말이냐며 반발하지만 세종대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수양대군은 석보상절, 세종은 월인천강지곡을 지어 죽은 소헌왕후를 위로한다.

 
소헌왕후는 크게 두드러진 역할은 없으나 세종의 든든한 지원자로서 조선시대 초기 왕권을 안정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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