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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 이야기

청백리의 최고봉 황희 정승 청백리의 최고봉 황희 정승 위의 사진은 국내에 있는 유일한 황희의 초상화 1363~1452 70년 이상을 공직생활을 했다고 한다. 1376년 우왕 2년, 녹사(말단관리)에 오른다. 1389년 문과에 급제한다.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1390년 성균관에서 근무하게 된다. 1392년 위화도 회군 이후 조선이 건국된다. 이에 황희는 관직을 그만두게 된다. 1394년 태조 이성계가 황희에게 관직에 복귀하라고 요청하고 등용한다. 언사(왕에게 쓴소리)로 파직당하고 복 귀하고를 몇 번을 반복한다. 1398년 정종이 즉위한 후 복귀했다가 파직당한다. 태종 1년, 이방원의 최측근이었던 도승지가 황희를 추천하고 발탁된다. 이후 황희는 태종의 도승지가 된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올렸을 때 황희는 양녕대.. 더보기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장영실과 안견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장영실과 안견 장영실과 안견의 공통점 1.장영실과 안견은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로 이 둘은 신분적인 제약이 있었다. 장영실은 노비 출신이었고, 안견은 도화서 화원으로 양반보다 지위가 낮았다. 신분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은 종3품까지 올라갔고, 안견은 종4품까지 올라간다. (참고.과거에 장원급제하면 종6품으로 장영실과 안견이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올라갔는지 알 수 있다.) 2.장영실은 조선 과학의 핵심자였고 안견도 최고의 미술가로 이들을 따르던 후배 인물들이 많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사임당도 안견의 화풍을 따라 그림을 그렸다. 3.장영실과 안견 이들의 기록이 별로 없다. 정확한 출생과 사망년도가 없다. 장영실(생몰년도 미상. 세종대왕과 비슷했을 거라는 썰이 있다) 장영실은 .. 더보기
이방원을 왕 위에 앉힌 브레인. 하륜. 이방원을 왕 위에 앉힌 브레인. 하륜. 1348~1416년. 본관은 진주. 1365년 공민왕 시기에 문과에 급제. 지공 거(시험 감독관)가 이인복과 이색이었다. 1368년 신돈의 문객들이 엄청난 비행을 일으켜 하륜이 이를 탄핵하다 신돈에 의해 파직당한다. 신돈이 피살당함으로써 관직에 다시 복귀한다. 그 사이 이인임의 힘이 커지게 되었고 이인임과 친해지게 된다. 그러면서 이인임의 조카사위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 이색의 문하생으로 신진사대부 쪽으로 붙게 된다. 우왕 시기 최영이 요동정벌을 단행할 때 요동정벌을 반대하며 유배를 가기도 한다. 그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바로 복귀되면서 전라도 순찰사까지 올라간다. 이색, 정몽주, 길재 이런 사람들과 처음에 뜻을 같이 했다. 고려 말 개혁가이나 새로운 국.. 더보기
소헌왕후 심씨(조선 최고의 국모로 추앙되다) 소헌왕후 심 씨(조선 최고의 국모로 추앙되다) 소헌왕후 심씨 1408년 충녕대군과 혼인하였다. 태종 이방원의 장남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자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세자빈이 된다. 1417년 왕비에 오르다. 일찍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방원은 상왕으로써 통치하였고 세종 초기 실질적인 힘은 태종에게 있었다. 고려 말 화약을 만든 최무선과 함께 왜구를 소탕하고 조선이 건국되고 궁궐을 짓고 종묘를 만드는데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심온은 소헌왕후의 아버지였다. 이 당시 영의정이란 높은 자리에 있었던 심온. 심온의 집 앞은 사람들로 늘 문전성시였다. 태종은 왕자의 난에서 보았듯이 외척은 왕권 강화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다. 이때 강상인이라는 자가 이방원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만 보고하는 일이 발.. 더보기
잘못된 세자 책봉이 불러일으킨 사건. 왕자의 난. 잘못된 세자 책봉이 불러일으킨 사건. 왕자의 난. 태조 이성계는 15살에 같은 마을에서 만난 처자와 결혼을 한다. 그 처자가 신의왕후 한 씨이다. 이 사이에서 6남 2녀를 낳는다. 이 조강지처는 결혼해 있는 동안 맨날 전쟁터에 나가 있는 남편으로 인해 힘든 세월을 보낸다. 그 사이 개성에서 유력 귀족 가문의 딸 신덕왕후 강씨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신의 왕후 한씨의 아들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어릴 때 죽음). 신덕왕후 강 씨의 아들 방번, 방석 . 이성계는 이런 자식들을 고려의 유력 가문들과 전부 혼인시킴으로 인해서 중앙을 잡을 수 있게 된다. 신의왕후는 1391년에 죽고 조선은 1392년에 건국된다. 이성계는 신의왕후의 3년상을 치르고 신덕왕후 강 씨를 왕비 자리에 올린다.(이 사.. 더보기
양녕대군은 태종이 무섭지 않았다? 양녕대군은 태종이 무섭지 않았다? 태종의 첫째 아들이었던 양녕대군. 본인의 처갓집과 세종의 처갓집을 박살 내었던 태종의 말을 엄청나게 듣지 않았던 양녕대군. 도대체 양녕대군은 왜 그랬을까? 태종이 무섭지 않았던 것일까? 무서웠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양녕대군은 태종이 무섭지 않았다. 양녕대군은 장남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방원에게는 위로 자식 셋이 더 있었고 자식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런 이방원에게 양녕대군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었던 셈이다. 양녕이 어릴 때 이방원은 정도전에게 밀려서 집에만 있는 동안 하루 종일 곁에 붙어 있으며 놀아주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양녕은 아버지가 무섭지 않았던 것이다. 이방원이 양녕을 세자 자리에 올리자 양녕은 기행을 일삼기 시작한다. 양녕은 남의 첩을.. 더보기
단종을 복위시키자. 단종 복위 운동. 단종을 복위시키자. 단종복위온둥. 단종 복위 운동으로 죽은 자들이 70여 명이고 그중의 일부가 사육신이다. 성삼문 호는 매죽헌. 무인 집안에서 자란 성삼문은 아버지와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의 주도자로 나섰다. 집현전 학자로 계유정난 시기에 공신 첩지를 받는다. 이유는 세조가 집현전 학자들을 회유하기 위함이었다. 단종이 상왕자리로 물러날 때 성삼문에게 옥쇠를 가지고 오라고 하자 성삼문은 옆에 수양대군을 두고서 엉엉 울었다고 한다. 수양대군이 왕 위에 앉자 복위 운동을 펼치게 된다.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등등 함께 세조와 세조의 측근들을 죽이고자 하는 계획을 세운다. 때마침 명나라 사신이 와 있었고 환송회를 열면 세조뿐만이 아니라 한명회, 수많은 훈구대신들이 모두 모일 테고 이 시점을 기점으로 잡아.. 더보기
피의 군주, 세조의 후손들은 어찌 되었을까? 피의 군주, 세조의 후손들은 어찌 되었을까?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세조가 죽고 나서 자신의 아들이 왕 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훈구대신이었던 한명회와 척을 지기도 한다.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 왕 위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단종이 죽기 전에 19살의 나이로 죽는다. 의경세자에겐 두 아들이 있었는데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이다.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 15살에 즉위하고 즉위한지 15개월만에 죽는다. 재위 기간동안 장인어른인 한명회와 척을 지게 된다. 예종도 왕권을 강화하고 싶었으나 장인어른을 밟고 올라서야만 했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남이장군이 공신으로 올라서게 되는데 예종은 이렇게 젊은 세력의 신공신을 싫어했다. 결국 유자광의 권모술수에 동조하여 남이장군을 죽인다. 예종이 죽었을 .. 더보기
수양대군, 조선의 왕이 되다. 수양대군, 조선의 왕이 되다. 단종이 즉위하고, 김종서와 황보인은 수양대군 세력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단종이 즉위한 후 명나라에 인증을 받기 위해 누군가 사신으로 가야 하는데 사신으로 안평대군을 추천한다. 그런데 수양대군이 자신이 가겠다고 자청하여 명나라로 떠난다. (사실 사신은 조선 중앙에서 멀어지는 것이고 명나라까지 가는 길에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몰랐기에 다들 꺼려하는 자리이다.)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활동하며 자신을 어필하고 온 수양대군은 세력이 강해진다. 이후 수양대군파와 고명대신파(황보인,김종서)로 대결구도가 잡힌다. 수양대군파 과거에는 급제했으나 가문이 좋지를 않아 권력에서 밀린 자들이 수양대군 쪽으로 붙었다. 바로 한명회와 같은 인물들이다. 신숙주와 정인지 같은 집현전 학자들도 수양대군편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