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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 이야기

잘못된 세자 책봉이 불러일으킨 사건. 왕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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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세자 책봉이 불러일으킨 사건. 왕자의 난.

태조 이성계는 15살에 같은 마을에서 만난 처자와 결혼을 한다. 그 처자가 신의왕후 한 씨이다. 이 사이에서 6남 2녀를 낳는다. 이 조강지처는 결혼해 있는 동안 맨날 전쟁터에 나가 있는 남편으로 인해 힘든 세월을 보낸다. 

그 사이 개성에서 유력 귀족 가문의 딸 신덕왕후 강씨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신의 왕후 한씨의 아들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어릴 때 죽음). 신덕왕후 강 씨의 아들 방번, 방석 .

이성계는 이런 자식들을 고려의 유력 가문들과 전부 혼인시킴으로 인해서 중앙을 잡을 수 있게 된다.

 
신의왕후는 1391년에 죽고 조선은 1392년에 건국된다. 

이성계는 신의왕후의 3년상을 치르고 신덕왕후 강 씨를 왕비 자리에 올린다.(이 사실은 신의왕후가 후궁으로 밀렸다는 소리이다) 그리고 신덕왕후 강 씨에 힘입어 방석은 세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성계는 세자인 방석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방석의 형 방번에게 병권을 넘겨준다. 이로 인해 방법의 권력이 세진다.

또한 신의왕후의 아들들을 지방에 보내버리려고 하나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는 사이 정도전이 방석을 지지하면서 교육하고 가르친다. 하지만 방석은 잘 따라오지를 못 한다. 

신덕왕후가 40세의 나이로 죽자 신의왕후의 아들들에게 기회가 생긴다.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정했을 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세자 책봉이라고 생각했었다. 워낙에 이방원이 똘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계는 방석을 세자로 고집했다는 점에서 주변 사람들의 신뢰를 잃기 시작한다.

 
또한 이성계의 절친 정도전도 여러 사건들로 인해 신뢰를 잃기 시작한다.

바로 표전문 사건인데 조선을 건국하면서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이 건국되었습니다. 책봉해주십시오.'라는 외교문서를 수많은 학자들이 함께 의논하여 작성해서 명나라에 올렸다. 그런데 당시 명나라의 황제였던 주원장 홍무제가 이 문서를 보고 시비를 걸었다. 홍무제는 요동정벌을 주장하고 있었던 정도전이 오기를 바라며 시비를 걸었는데 정도전이 오지를 않고 정총이 갔다.

 

그래서 홍무제는 정총을 감옥에 가둬버리게 되고 뒤이어 권근이 가게 된다. 권근은 수완이 좋아 표전문 문제를 잘 해결하고 돌아오나 정도전은 권근을 탄핵시킨다. 바로 권근이 명나라까지 갔으면서 감옥에 갇혀있던 정총을 데리고 오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게 대쪽 같은 성품이었던 정도전은 이 사건 이후로 요동정벌을 더욱더 주장하게 된다. 사실상 요동정벌은 불가능했다.

또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주장했다. 정도전은 아마도 이방원의 사병들을 없애버리면 이방원은 꼼짝 못 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개인 군대를 관군으로 편입시키려 하는데 당시 이지란(이성계의 의형제)과 방과는 이성계 집안의 사병을 지휘하는 책임자로서 정도전의 의견에 크게 반발하며 이 씨 집안의 미움을 사게 되는 계기가 된다.

 
<1차 왕자의 난>

 

이방과는 별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도망간다. 방의, 방간은 이방원을 보자마자 살아남기 위해서 말에서 떨어지며까지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당시 태조 이성계는 누워있었다고 한다. 궁궐 수비대장 박위는 처형당하고 많은 부하들이 이방원에게 투항한다. 이방원은 남은과 정도전, 방번과 방석을 죽인다. 

이방원은 위로 형들이 많았기에 왕위에 올라앉을 명분이 없어 두 번째 형 이방과를 왕위에 올리고 본인이 세자가 된다. 원래 같으면 이방과의 동생 이서 세제이나 이방과의 아들로 입적을 하면서 세자가 되는 것이다. 

<2차 왕자의 난>

 

이방간이 박포(1차 왕자의 난에서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이 많아)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난을 일으킨다. 

후에 정종이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겨주며 태종이 된다. 태종은 정종과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이성계는 함흥에 기거하게 된다. 명절이나 생일 때 태종이 함흥으로 차사를 보내면 함흥에 있던 이성계는 차사들을 활로 쏴 죽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함흥차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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