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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를 담다.

개구리소년 실종사건(대구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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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소년 실종사건(대구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사건)

실종 전단지

1991년 3월 26일 이 날은 지방자치 선거일로 날씨가 흐리고 비가 왔었다. 뜻하지 않은 휴일을 맞아 들뜬 5명의 아이들은 대구 와룡산으로 도롱뇽을 잡으러 가겠다며 집을 나섰고 그 이후 돌아오지 못했다. 

단순 가출로 여겼던 경찰들은 아이들이 오랜 기간동안 돌아오질 않고 행적이 묘연해지자 그제야 와룡산을 뒤지기 시작했고 5명의 아이들이 사라진 만큼 이 사건은 크게 이슈화가 되었다. 그래서 대통령이 직접 특별지시를 하여 1991년 7월 5일 25개 조(1개 조 50명)의 경찰수사대를 동원하여 와룡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1992년 11월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이라는 영화가 개봉하고 노래가 나올 정도로 온 국민의 관심사였던 개구리 소년 실종사건이었지만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 했고 기다림의 시간 동안 부모들을 힘들게 했던 건 수많은 허위제보들이었다.

또한 당시 카이스트 심리학 전공 교수가 김종식 군의 아버지 김철규 씨가 아이들을 살해 후 집 어딘가에 묻었다는 가설을 내놓았고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발견되지 못했고 이 일로 교수는 카이스트에서 해고당하고 심리학회에서 제명당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02년 9월 대구 와룡산 중턱에서 유골이 발견되었다. 도토리를 주우러 갔던 인근 주민에 의해 깊이는 대략 40센티의 깊이로 유골 4구가 발견되었고 그 다음날 나머지 시신 1 구도 좀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경찰이 처음에 입장 발표를 저체온증으로 발표하기도 했었고 정밀 감식반이 오기도 전에 삽으로 마구 파헤쳐 유골 뼈를 마구 섞어 놓아서 마지막 발견자만 정밀 감식반이 와서 제대로 발굴했다고 한다.

 

발견 장소는 소년들의 집에서 3.5킬로 떨어져 있었고 당시 수색을 30만 명이 300회 넘게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발견된 장소는 수색 포함된 지역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높이 300미터에 불과한 야산이었다. 바로 근처에 구미 고속도로가 있어서 밤이 되면 인근 마을의 불빛으로 어둡지가 않았다. 그리고 유골 발견 장소에 표시라도 해 둔 것처럼 20킬로의 바위가 뉘어져 있었다.

 

목격자들의 증언

조호연의 형 - 9시 와룡산 입구에서 아이들을 만났는데 내가 어디 가냐고 물어보니 도롱뇽 잡으러 간다고 했었다.

2명의 친구 - 12시 슈퍼마켓 근처에서 5명의 아이들이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안 간다고 했다. 그때 5명 아이들의 주머니에 뭔가가 많이 들어있어 보였다.

중학교 1학년 아이 - 3시 즈음 도롱뇽 잡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1마리 달라고 했었으나 안 준다고 하고서는 산으로 더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목격자 - 5시에 이현 공단에 근무하던 아버지를 위해 도시락을 들고 버스에 탔는데 가축 도살장 부근 정류장에서 5명의 아이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도롱뇽을 잡아서 뭐하려고 하냐는 질문에 아이들이 와룡산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가져다주면 몇 백 원을 준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목격자 - 6시에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을 보았다.

 

유골의 모습

우철원(13세)- 좌우측 옆머리에 구멍이 2개 나있고 구멍 주위에 누군가 찍은 것처럼 직사각형 모양으로 파여있다

조호연(12세)- 상흔이 없음

김영규(11세)- 우측 옆머리 부근 골절. 상의는 십자 매듭(일반인들이 묶는 법), 하의는 일자 매듭(특수 매듭) *마지막 발견*

박찬인(10세)- 상흔이 없음

김종식(9세)- 우측 눈 위에 구멍이 나있고 구멍 주위로 10센티가량 골절

 

당시의 여러 가설들

1. 총기 사고설

당시 와룡산 일대는 50사단의 훈련지역, 사격장이었다. 실제로 아이들이 발견된 장소엔 탄피들이 많았다.

목격자 중에 도롱뇽 잡으러 간다는 말도 있었지만 탄피 주우러 갔었다는 말도 있었다. 당시에 탄피를 수거해서 필통에 넣어가지고 다니거나 반지로 만드는 것이 유행 기도 했었기에 실종자 가족들이 제일 믿었던 가설이자 가장 유력했던 가설이었다. 그러나 이 총기 사고설은 사입구와 사출구가 유골에서 발견되지 않았고 국과수뿐만 아니라 미국의 법의학자도 총기 사고가 아니라 함에 따라 아닌 것으로 판정되었다.

 

2. 불량 청소년들의 범행설

당시 와룡산 근처에 살았던 사람들에 의하면 와룡산은 불량 청소년들의 우범지역이었다고 한다. 

 

3. 무장공비설

마지막 발견된 유골에서 일자 매듭은 일반인들의 80프로는 사용하지 않는 매듭이었다는 점과 와룡산은 땅파기 어려운 곳인데 땅을 파서 묻었다는 점 때문에 나온 가설이었으나 무장공비 치고 후처리가 어설프지 않을까?

 

4. 사냥꾼의 오인사격설

 

5. 외계인의 납치설

유골 발견 당시 머리카락과 치아 몇 개가 발견되지 않았다. 

 

6. 범인은 여자다

아이들을 제압할 때 남자라면  굳이 상처를 많이 내면서 죽이지 않는다. 아이들의 유골에서 발견된 흉터로 미루어 짐작하면 초등학생 5명을 혼자 감당하려면 도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우철원군의 머리에 파인 자국은 용접 시 쓰이는 똥 망치 같은 것(한쪽은 뾰족하고 한쪽은 직사각형)이다. 하지만 여자 혼자서 아이 다섯을 상대하기엔 버거울 것이다.

 

7. 앵벌이 및 염전 노예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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